덕 행 편 (德行篇)
1. 11세 춘(春)공 자 인백(仁伯) (1533~1592) | |
부 배천군수 희성(希聖) 조 장사랑 세형(世亨) 증조 병절교위 수연(壽延)
공은 문장(文章)에 능하여 세종13년(1534) 갑오문과(甲午文科)에 퇴계 이황(李滉), 정응두(丁應斗)와 함께 동반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신 희성(希聖)공의 장자로 태어나시고 선조(宣祖) 9년(1576) 사마양시(司馬兩試)에 등과 하시고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역임하셨다.
공은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때 왜군의 핍박으로 천마산(天馬山)으로 들어가 나월봉(蘿月峰)아래서 돌아가셨는데 후대(後代)에 와서 지평(持平) 김동필(金東弼)이 글을 짓고 진사(進士) 진기범(陳箕範)이 쓴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덕행(德行)을 널리 쌓고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으니 그 누가 경경(敬慶)하지 않으리오. 후손들은 효성스러웠으며 벼슬이 혁혁하였으니 이는 다 공(公)의 음덕(陰德)이라」하였다. 공의 손(孫) 업(嶪)공 사형제(四兄弟)의 효도(孝道)와 삼자(三子) 은(訔)공이 배(配) 옥천전씨(沃川全氏)의 순절(殉節)로 열녀(烈女)가 되니 사 효자(四 孝子) 일 열녀(一 烈女)의 정문(旌門)과 비석(碑石)이 세워진 효행가문(孝行家門)을 이루게 하셨다.
자료: 대동보 상권 552쪽, 세덕록 245쪽, 덕수 | |
2. 11세 구(耈)공 자 응기(應祈) (1561~1619) | |
부 병절교위 의종(義宗) 조 일관교수 헌(軒) 증조 병조참판 수윤(壽胤) 공은 선조(宣祖) 23년(1590)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及第)하시고 아홉 번이나 벼슬자리를 추천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나 공의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고 공의 아들 형수(馨秀) 형원(馨遠) 형제의 충효절행(忠孝節行)이 뛰어나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타의 모범이 되니 나라에서는 공에게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侍正)이 증직되었다.
자료: 대동보 상권 190쪽, 세덕록 245, 134쪽, 풍덕수운 | |
3. 15세 만형(萬衡)공 자 자평(子平) (1634~1703) | |
부 응택(應澤) 조 중추부사 대정(大鼎) 증조 중추부사 서(恕) 공은 숙종(肅宗) 8년(1682) 증광(增廣)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시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고 풍채가 늠름하여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우암(右庵) 송시열(宋時烈) 선생 문하(門下)로 사제지의(師弟之義)가 두터웠고 여러번 벼슬길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셨다. 우암 선생이 화(禍 )를 입게 되매 세 번이나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리신 지조(志操)높은 선비이시다.
자료 : 대동보 하권 460쪽, 세덕록 246, 211쪽, 황간금산 | |
4. 17세 성태(成兌)공 자 태우(泰佑) (1670~1752) | |
부 감찰 귀종(貴宗) 조 중립(仲立) 증조 응룡(應龍) 공은 공근(恭謹)하며 덕행이 뛰어나 사람이 자기에게 실례를 해도 성내지 않고 오직 자기가 남에게 실수할까를 두려워했으며, 덕성(德性)이 안으로 심오(深奧)하여 의(義)로서 사귀었으며, 당세(當世)에 문장이 뛰어났다.
평생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고 이웃 아이들이 대추를 따다가 공을 보고 도망치거늘 공이 주어 모아가지고 더 보태서 갖다 주도록 했고 또 벼를 베어가던 도적도 공의 아량에 감복하여 부끄러히 여기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였다 하며, 객(客)이 오면 먼저 읍(揖)하며 맞이하니 마을 사람이 다 감화(感化)되었다 한다. 40이 지나도록 과거에 들지 못하여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글만 읽고 회포를 읊으며 문집(文集)을 남기셨다.
자료: 대동보 상권 277쪽, 세덕록 247쪽, 풍덕산귀 | |
5. 19세 봉수(鳳壽)공 자 영범(英範) (1724~1756) | |
부 처중(處重) 조 성태(成兌) 증조 사헌부감찰 귀종(貴宗) 공은 선친(先親) 처중(處重)공이 지으신 육계(六戒) 가훈
첫째 성찰(省察) : 살피고 반성함 등을 잘 지켜 모든 생활을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고 검소한 옷차림에 담백한 음식으로 살아가며 학문연구에 전념하면서도 선조님 뜻을 받들지 못했노라고 자탄하셨다.
공의 후손들 중에는 효자(孝子) 문장가(文章家)가 많이 배출되었다.
자료: 대동보 상권 278쪽, 세덕록 247쪽, 풍덕산귀 | |
6. 23세 광삼(光三)공 (1891~1961) | |
부 병추(秉樞) 조 의풍(義豊) 증조 이혁(以赫) 공은 성품이 엄격하시고 정직하며 한학에 박학(博學)하셨다. 시계 업에 종사하시다 신학문(新學問)에 뜻을 두시고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나가사끼시(長崎市)에서 송전시계점(松田時計店)을 경영하시며 정직과 박식(博識)이 일인사회(日人社會)에서도 인정되어 많은 유명인과 친교(親交)를 맺으시니 이를 기화로 교민(僑民)들 특히 많은 어부들이 나포(拿捕)되어오면 이들을 도와 귀국시켜주고 제2차대전시에는 많은 사람이 징용(徵用)으로 끌려와 석탄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도망쳐서 교민들의 집에 숨어 있는 사람을 공의 집에 숨겨두고 기회를 봐서 어선을 이용하여 귀국시켜 주었으니 그 수는 16명에 달하였다.
공이 1945년 해방이 되어 귀국하시자 이를 알고 멀리 제주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서울등지에서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간 사람이 많이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687쪽, 세덕록 248쪽, 덕수 | |
7. 24세 연긍(然肯)공 자 좌현(佐賢) (1885~1941) | |
부 선전관 영모(泳模) 조 고성부사 태항(泰恒) 증조 단천부사 도(鍍)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응(對應)하시면서 신의(信義)를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생활하셨다.
공은 평생 동안 부모의 기침(起寢)에 문안드리는 신필성후(晨必省候)의 예(禮)를 실천하시고 부모님 공양에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시니 부모님이 연로하실 때 까지 건강하게 장수하시었다. 그리고 선천(先親)께서 주관하시어 년 2회 개최하는 시회(詩會)와 생신잔치를 성대히 차려 많은 사람을 대접하는 등 부모님 마음을 크게 즐겁게 하여 주변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일제말엽(日帝末葉) 농촌은 빈곤(貧困)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중농(中農)으로 직접 영농을 하는 데는 고정인력 2~3인 외에도 많은 일용(日傭) 노력(勞力)이 필요하게 되므로 동리 사람들에게 일감을 제공하여 임금을 지불하고 그 가족들에게는 식사를 대접하여 춘궁기(春窮期)를 모면하게 하셨으며 과객(過客)에게는 침식(寢食)을 제공하고 어렵고 집 없는 사람에게 거처(居處)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여 주어 정착(定着)케 하는 등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묵묵히 실천하셨다. 공은 평생 동안 본인은 근면(勤勉) 검소(儉素)하게 생활하시면서도 타인(他人)에게는 넉넉하게 베풀면서 적선(積善)을 하시었다.
공은 산야(山野)에 나무를 심어 연료(燃料)와 과실(果實)을 얻고 전답농사(田畓農事)를 지을 때 추경(秋耕)하고 퇴비(堆肥)를 많이 넣어 다수확(多收穫)을 하는 모범독농가(模範篤農家)가 되셨다.
한편으로 사랑방을 동리 청장년(靑壯年)들의 담화(談話)와 공동작업장으로 쓰게 하여 협동정신을 함양하고, 일제시대에는 학교에서 우리말과 한글말살 정책을 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 역대왕의 정사(正史)와 위인열전(偉人列傳)등 한글판 이야기 책자를 수십 권 비치하고 서로 낭독(朗讀)케 하여 한글을 익히게 하고 우리나라 역사와 교양교육을 받도록 하여 문맹퇴치(文盲退治) 운동에도 적극 노력하시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독실(篤實)한 지도자로 공을 흠모(欽慕)하고 추종(追從)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은 숭조경친(崇祖敬親)의 의지(意志)가 각별하시어 대소가(大小家) 종사(宗事)에 적극 참여하시고 1931년에는 종친을 규합하여 정헌공파(正憲公派) 및 옹진공파(甕津公派) 종중회(宗中會)를 결성하시고 종중재산 보존을 위한 조치(措置)를 취하시고 선조님 묘소 소재(所在) 임야가 타성(他姓)에게 매도되는 것을 자신이 매입(買入) 하여 분묘를 그대로 보존(保存)케 하는등 종사에 선도적(先導的)인 자세로 대처(對處)하신 공적(功績)등을 추앙(推仰)하여 선천부사공계종중회(宣川府使公系宗中會)에서 1984년 4월 5일에 송공비(頌功碑)를 근립(謹立)하였다.
자료: 대동보 중권 512쪽, 세덕록 249쪽, 남양쌍부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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