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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김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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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문을 빛낸 선조님
  • 현 신 편
  • 가문을 빛낸 선조님

    해풍김씨 가문을 빛낸 선조님을 소개합니다.

    현 신 편 (賢 臣 篇)

    1. 선 정 비 (善 政 碑)
    가. 17세 수(洙)공    자 심원(深源) (1680 - 1728)
      부 증 호조참판 하중(夏重) 조 증 병조참판 성(城) 증조 증 좌찬성 대건(大乾)
     
    공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국란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신 여러분의 선조님을 모시고 있는 충의효절가문에서 성장하시고 숙종28년(1702)에 무과에 등과하셨다.   관직은 사헌부 감찰, 훈련중군 충청수사 전라병사 남병사 북병사 남한관성장 영흥 수원 혜령등 부사와 포도대장 세 번, 평양병사 재임등 주요직책을 두루 역임하시면서 선정(善政)을 베푸시니 공의 행적을 추모하여 세워진 선정비가 덕주원(德州院) 교동(校洞) 강계(江界)등에 있다.
     
    그 중에서 강계무휼선정비(江界撫恤善政碑)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덕(德)을 변방(邊方)을 다스리니
         그 은택(恩澤)이 영세(永世)에 끄침이 없고
         의(義)는 비록 장졸간(將卒間)이지만
         은덕(恩德)은 부자(父子)와 같더라
     
    공은 영조2년(1726)에 평안병사로 재임시 본영(本營)시설을 개수하면서 남문루(南門樓)와 백상루(白祥樓)를 단청하고 청남루(淸南樓) 현판을 친필로 써 붙였다.
     
    영조3년에 여영중군으로 임금의 재가을 받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고 영조4년 2월9일 별시시관(別試試官)으로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불편한 몸으로 예궐하고 모화관(慕華館)시험장으로 4일간 왕래하며 소임을 다하고 집에서 요양하시다 영조4년 3월15일에 운명하시니 영조대왕이 예조좌랑(禮曹佐郞) 권덕재(權德載)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봉행하게 하였다.
     
    공의 포도대장 3회 중임에 이어 장자 상옥(相玉)공이 우포도대장이 되시고 장손 영(煐)공은 좌우포도대장을 24회나 중임하시니 3대에 이어 국가안녕질서 유지에 크게 공헌 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156쪽, 하권 696-708쪽, 남양쌍부파
    세덕록 159쪽, 조선왕조실록 숙종, 경종, 영조편

    나. 19세 영(煐)공    자 경명(景明)
      부 증 병조판서 상옥(相玉) 조 평양병사 수(洙) 증조 증 호조참판 하중(夏重)
     
    공은 대대로 8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신 장신가문에서 성장하고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이 바르고 학문과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하면서 남달리 담력이 강하셨다 한다.
     
    공은 1794년에 무과에 등과하시고 순조8년(1808)3월에 단천부사(端川府使)로 부임하셨는데 그때 단천과 북청 두 고을의 백성들이 관문앞에서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어 조정에서는 민심을 수습하는데 명분과 기강이 있음을 알려야 하겠으므로 임금이 여러 재상들의 의견을 물어보시고 김영(金煐)을 단천부사로, 이덕현(李德鉉)을 북청부사로 차임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의 풍속이 완고하고 사나우니 각각 무마하고 진안(鎭安)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시니 공은 왕명을 받들어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흉흉하던 단천고을에 평온을 되찾게 하셨다.
     
    순조28년7월에 우포도대장으로 임명되시고 동29년(1829)1월에는 제166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여 큰 화재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역주민에게 선정을 베푸시다 파직을 당하게 되니 주민들은 공의 은덕을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을 바위 위에 새겨 놓았다.
     
    "화재의 고난을 겪은 백성들이 공께서 안전하게 조치해 주신 덕택으로 걱정근심을 덜어 버리니 춥고 배고픔 막아주신 은혜 크고 많은 집들을 전과 같이 다시 짓게 해 주시니 재난은 이미 지난일 되었고 옛과 같이 살게 되었도다.   이는 순조29년 기축년 공이 통제사로 계실 때 송정동 백성의 잘못으로 불이 나 이웃으로 번져 해송정 건너 북와동까지 옮겨 붙어 인가 수백호가 다 타버리게 되자 공이 남북산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게 하였다.   소나무를 남벌 하게한 일로 파직이 되자 4개 동민들이 공의 은덕을 기리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 서정(曙町), 정량리(貞梁里)의 경계인 바닷가에 있다.  바위는 공이 장감을 들고 서서 여러날에 걸쳐 군과 민을 지휘하며 불을 끄게 한 바위로서 다음해 경인년(1830)에 위 글을 새겼다.”
     
    위 기록은 통영군지(1934년판) 인편에 통제사 김영 각암비문(金煐 刻巖碑文)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충무 세병관(洗兵館) 건물 뒤뜰에 역대 삼도수군통제사들의 공적비 41기 가운데 공의 거사비(去思碑)도 함께 세워져 있다.
     
    공은 순조31년 11월에 우포도대장에 재임되신 이후 공이 포장으로 계시면 세상이 조용하고 포장을 사임하면 도적떼들이 기승하니 공을 다시 포장으로 임명하면 세상이 평온하여지는 까닭에 24번이나 포도대장을 중임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세간에는 공의 업적을 찬양하는 이현장신 민간동요를 지어 불렀으며, 고종때 큰 도적떼들이 세상을 우울하게 하자 공을 동경하는 동요가 다시 등장하여 넓이 불리워졌다.

    이현장신공을 흠모하여 불려진 동요.
    (고종때 큰 도적의 난이 있어 세상이 어지러울 때 불려진 동요)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泥峴將臣)공이 다 늙어 가노라
         영웅호걸은 늙던지 말던지 붙잡던 세월은 가고야 말었오
         이현장신도 가고야 말었오 유명한 포장 이현장신
         이현장신만 늙지를 마소서 이세상 이때에 다시 한번 오소서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 다 늙어 가노라
         앉아서 천리요 서서 만리라 눈만 뜨시면 자버대령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좌우포장 스물네번에 조선천지가 잔잔하고나
     
    공은 헌종5년 7월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제수받고 재임중 춘궁기인 어느날 아침 일찍이 평양 시내를 내려다보니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솟지 않아 이상히 여기시고 민정을 살펴보니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굶주리고 있음을 아시고 평안도 쌀값이 높다는 소문을 퍼트려 전국의 미곡상들이 쌀을 싣고 대동강으로 몰려들어 왔을 때 금족령을 내리고 화주들을 관가로 불러드려 백성들의 식량사정을 설명하고 관가에서 싼값으로 쌀을 매입하여 원가에 약간의 이자를 부쳐서 주민에게 분배하여 주고 다음해 농사를 지어 상환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식량난을 해결하시니 공의 기지와 결단이 돋보이는 행적이시다.
     
    그 후 헌종9년(1845)7월에 제883대 한성판윤, 동10년1월에 어영대장, 동11년2월에 형조판서가 되시고 동13년7월에 어영대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일원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여생을 지내고 계실 때 임금께서 다시 등용하시려고 측근에게 안후를 물으시니 안맹(眼盲)하여 앞을 못 본다고 아뢰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친지의 기군망상(欺君罔上)의 대죄를 면하여 주려는 뜻에서 그 길로 검은 돌안경을 쓰시고 일생을 맹인 행세로 마치신 원망을 관용으로 승화시킨 분이시기도 하다.
     
    공은 문장과 문필에도 뛰어나시니 당대 문무겸전의 장신으로 조선문무요인록(朝鮮文武要人錄)에 등재되셨다.
     
    공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신후 순조29년(1829)에 시조분영(始祖墳塋)을 찾기 위하여 예부터 전해 오던 개성 남문밖 15리 풍덕부좌후리장지천해좌원(豊德府左後里長芝川亥坐原)에서 참된 자취를 목도하고 봉분을 다시 쌓고 순조31년(1831)에는 묘비를 근지병서(謹識幷書)하여 근립하시고 효성스럽게 제례를 올릴수 있도록 하여주신 큰 업적을 남기선 선조님이시다.

    자료: 대동보 중권 196쪽, 하권 708 - 715쪽 남양쌍부
    세덕록 170쪽, 조선왕조실록 순조, 헌종편

    다. 21세 건(鍵)공    자 군옥(君玉) (1798 - 1869)
      부 증 좌찬성 병철(秉喆) 조 증 병조판서 의( 義 ) 증조 증 호조참판 상택(相宅)
     
    공은 장신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두뇌가 명석하고 문무를 겸전한 재능을 가지면서 매사에 성실하였으므로 주요 직책에 두루 등용되셨다.
     
    공은 순조18년 남선무과에 등과하시고 무관겸 선전관, 오위장, 경흥부사를 역임하시고, 헌장4년(1838)에 충청도수군절도사, 동12년에 함경북병사, 철종12년(1861)에 좌변포도대장, 고종원년(1864)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고종3년에 제177대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동4년에 제190대 삼도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동5년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使),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삼군부사겸 훈련원사에 임명되시는등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시고 삼도통제사를 2회 중임(重任)하시고, 충무 세병관(洗兵館) 건물 뒤뜰에 공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보존되어 있으며, 공은 문무를 겸전하신 장신으로 조선문무요인일람으로 조선문무요인록(朝鮮文武要人錄)에 등재되셨다.
     
    공의 높은 관직과 많은 공적으로 선대 조상님에게 증직이 되신 것으로 보아 공에게는 많은 업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전해지는 행적이 없어 애석하다.
     
    공은 숭조위선(崇祖爲先)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시고 고종2년(1865)에 전국의 종친을 규합하고 고증문헌을 근거하여 제3차보인 을축보(乙丑譜)를 여덟권으로 편집하여 주심으로써 현재의 해풍김씨세보의 기틀을 마련하여 주셨다.
     
    후손들의 모임인 쌍부파 동지중추부사공계종문회에서는 공의 음덕(蔭德)을 추앙하고 위업(偉業)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1995년도에 묘소를 단장하고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자료: 대동보 중권 486쪽, 세덕록 194쪽, 남양쌍부
    조선왕조실록 헌종, 철종편

    라. 22세 태린(泰麟)공   자 성인(聖人)
      부 현(鉉) 조 삼도통제사 한철(翰喆) 증조 형조판서 영(煐)
     
    공은 철종11년(1860)에 무과에 등과하시고, 선전관, 훈련원첨사, 곤양군수, 안동영장, 자성부사겸 영남수군방어사를 역임하셨다. 공은 곤양군수(昆陽郡守) 재임시 선정을 베푸시어 군민의 뜻을 모아 공덕을 추앙하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건립하였으며 현재 사천군 곤양면사무소 앞에 보존되어 있다.

    자료: 대동보 중권 255쪽, 세덕록 200쪽, 남양쌍부

    2. 선 정 기 (善 政 記)
    가. 13세 형(瑩)공    자 여수(汝售) (1568 - )
      부 증 병조참판 우추(遇秋) 조 부사 경(瓊) 증조 현감 석철(錫哲)
     
    공은 남선무과에 등과하시고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왜적의 세가 강하여 전국여러읍(邑)이 환란(患亂)을 입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그 중에서도 도래(東萊)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공을 선발하여 동래현령(東萊縣領)을 제수하시니 공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략과 용기로 적을 토별하고 난민을 구제하는데 큰 공을 세우시는 한편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에서 승군(僧軍)이 수십명씩 도착하면서 조총과 칼 창 쓰는법을 배우고자 하여 공은 이들을 훈련하게 하고 관군으로 삼아 적과 싸우게 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리게 하였다.
     
    공은 아들 4형제를 두셨는데 그 중 3형제를 공신(功臣)으로 키워내신 선조님이시다.
     
    장자 대건(大乾)공과 넷째아들 체건(體乾)공은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고, 둘째아들 시건(始乾)공은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이 되시니 나라에서는 김형(金瑩)공에게 삼공신 자제의 공훈(功勳)으로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와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증직하였다.

    자료: 대동보 중권 190쪽, 하권 684쪽, 세덕록 157쪽, 남양쌍부
    조선왕조실록 선조편, 국조보감 및 청강집

    나. 18세 상옥(相玉)공   자 온숙(溫淑) (1727 - 1790)
      부 평양병사 수(洙) 조 증 호조참판 하중(夏重) 증조 증 병조참판 성(城)
     
    공은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훈련원도정과 포도대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신 수(洙)공의 장자로 출생하여 영조26년(1750) 무과에 등과하시고 영조45년 명릉(明陵) 보토역사(補土役事)에 도청(都廳)의 직책으로 공역(公役)을 앞당겨 마쳤다는 말을 왕이 들으시고 가자(加資)하시고 전라좌수사로 승서(陞敍)하셨다. 정조원년(1777)에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동2년에 우포도대장이 되시고, 동년 9월에 임금이 세마대(洗馬臺)에서 오영(五營)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금군과 수영, 총영의 군사들이 싸우게 하였을 때 승부가 나지 아니하고 군병이 혹 상처를 입을까 우려워 싸움을 중지케 하였으나 금군별장으로 출전한 공이 말하기를 “장수는 군중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다”는 의지로 퇴진하지 않고 적진을 격파하고 적의 군졸들을 사로잡아 포로를 단 아래에 바치니 임금이 매우 가상히 여겨 공에게 숙마(熟馬)를 면급(面給)하시고, 곧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훈련원도정으로 승서되셨으며, 자허내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가 증직되었다.
    공은 문무겸전의 장신으로 유작시(有作詩)가 전해지고 있다.

         청산아 말 물어보자 고금(古今)일을 네 알니라
         만고영웅(萬古英雄)이 몃몃치나 지내였노
         이후에 뭇는니 있거든 나도 함꾀 닐너라

    자료: 대동보 중권 196쪽, 하권 708쪽, 남양쌍부
    세덕록 165쪽, 조선왕조실록 영조. 졍조편

    다. 19세 희(爔)공    자 원명(元明) (1749 - 1811)
      부 증 병조참판 상태(相台) 조 회령부사 (浚) 증조 증 호조참판 하중(夏重)
     
    공은 영조49년(1772) 무과에 등과하시고 정조20년(1796)에 화성성역 동장대 축성시별군직으로 감궤(監饋)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로로 정조21년에 충청도병사로 승서되시고, 순조3년(1803)에 함경북병사 동5년에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동5년에 공충도병사, 동8년 12월에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부임하기 전에 순조임금님은 공을 소견(召見)하시고 말하기를 “강계는 본래 관방(關防)의 중지(重地)인데 근래에 민생이 골수에 사무친 폐단이 있으므로 이번에 묘당(廟堂)에서 가려서 차임(差任)하여 보내니 내려간 후에 잘 교혁(敎革)하고 마음의 다해 대양(對揚)이 옳다.  전에 정주(定州)에 재임하였을 때 반드시 강계의 폐단을 자세히 들었을 것인데 무슨 폐단이 심한가?”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인삼의 폐단, 환곡의 폐단, 방수(防守)의 폐단 등 세가지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려가거든 더욱 교혁하는 도리에 유념함이 옳다” 하였다. 공은 왕명을 충실히 받들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심이 평온하여 지니 공은 동9년(1809)10월에 함경도남병사 겸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승배(陞配 )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204쪽, 세덕록 179쪽 남양쌍부
    조선왕조실록 순조편

    라. 19세 혁(爀)공    자 중명(仲明) (1775 - 1814)
      부 증 병조참판 상훈(相勳) 조 회령부사 준(浚) 증조 증 호조참판 하중(夏重)
     
    공은 영조51년(1775) 무과에 등과하시고, 정조11년(1787)5월 거제부사(巨濟府使)로 재임 중 영호남과 관동북(關東北) 등 6개 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을 때 곤궁한 거제주민을 구원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한 공적을 나라에서 인정하여 승서되시고, 정조19년 1월에 장령(將領)으로 화성성역(華城城役) 감동(監董)에 임명되어 정조20년 8월까지 282일간에 강무당 뒤 행각(行閣), 동성(東城), 남서성(南西城), 남수문, 서성, 서포루(西砲樓), 구천방보토 등 공사를 충실히 감독하신 결과 성역준공(城役竣工) 논상(論賞)때에는 승서(陞敍)와 동시에 내하후궁(內下帿弓) 일장을 사급(賜給) 받으셨다. 정조22년7월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순조2년(1802)6월에는 충청도병사가 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207쪽, 세덕록 181쪽 남양쌍부)
    조선왕조실록 정조, 순조편. 화성성역의궤 55쪽

    마. 19세 후(厚)공    자 광중(光仲) (1751 - 1805)
      부 증 호조참판 상걸(相傑) 조 선천부사 선(渲) 증조 증 대사헌 임중(任重)
     
    공은 영조51년(1775) 무과에 등과 하시고, 정조18년(1794)2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중군(京畿中軍)으로 계시다 동년 9월에 화성성역도소(華城城役都所) 독성중군(禿城中軍)으로 이배(移配)되어 별감동(別監董)으로 근무하시다
     
    1795년 윤2월에 전라좌수사로 승배되시고 곧 독성중군으로 복귀하여 장안문(長安門) 동쪽 화홍문(華虹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동북성(東北城), 동장대(東將臺), 구천방보토(九川坊補土)등 공사를 총지휘 감독하시고 수원성 중에서도 예술적으로 대표적 적축물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등 민족문화유산을 창조하는데 크게 공헌하셨으며, 도청중군(都廳中軍)으로 화성성역 공사에 소요되는 인력 과 물자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하여 적기에 공급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 하므로서 대역사(大役事)를 성공리에 준공하게 하였으므로 정조는 20년(1796) 9월10일 공사준공을 기하여 “도청중군 김후(金厚)는 그 공로가 큼이 다만 책응(策應)하는 공로만이 아니었으니 잠깐 기다렸다가 규칙을 세워 병곤(兵閫. 병마절도사)으로 승서하라”는 말씀과 함께 숙마(熟馬) 일필을 특별히 사급(賜給)하셨다. 그 후 공은 정조22년 2월에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승배(陞配)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242쪽, 세덕록 183쪽 남양쌍부
    조선왕조실록 정조편, 화성성역의 궤

    바. 20세 재연(載淵)공   자 성양(聖養) (1724 - 1777)
      부 중추부사 형기(亨基) 조 증 호조참판 성광(成光) 증조 좌승지 종엽(宗燁)
     
    공은 영조20년(1744) 무과에 등과하시고, 동26년부터 동28년(1752)까지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재임하셨을 때 흉년으로 많은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 함을 측은히 여기시고 선정을 베풀면서 목장에 마축(馬畜)이 번성하게 하니 도민(島民)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이 내용을 듣고 내직(內職)으로 승진되어 올라올 때 온 백성들이 나와 전별을 아쉬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비석을 세워 은혜를 추모하였다.

    자료: 대동보 하권 208쪽, 세덕록 193쪽 정주

    사. 25세 형근(亨根)공   (1915 - 1993)
      부 윤면(潤冕) 조 완진(完鎭) 증조 참봉 이효(彛孝)
     
    공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에 유학하여 동 대학 재학중 1939년 10월 24세의 약관(弱冠)으로 일본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시고, 27세때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지내셨다.
     
    해방이 된 후 연세대학교에서 법학 강의를 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서 형법 강의를 하시는 등 후진양성에 힘쓰시다 1949년 35세때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이 되어 대통령을 잘 보필하시고, 40세에는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셨다.
     
    41세에는 한국미곡창고주식회사 사장과 서울신문사 사장을 겸임하셨는데 공은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까닭에 이대통령께서 생활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뜻에서 겸임발령을 내리셨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공은 1953년 10월에 민간인으로서는 드물게 서울검찰청 검사장으로 계실때의 공로로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을 받으셨고, 1973년 이후 국회에서 선임하는 헌법위원(憲法委員)3인중 한분으로 세 번 연임하신 법조계의 태두(泰斗)이시다.
     
    1987년도 헌법위원 삼임(三任)후 퇴임할실 때 공의 건국 이후 국가발전에 기여하신 공적을 종합 평가하여 국민훈장무궁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서훈(敍勳)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1261쪽, 세덕록 202쪽 경
    자료: 대종회보 제 27호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