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문 (淵源)
우리의 시조할아버님의 휘(諱)는 숭(崇)자 선(善)자이시며, 고려 공민왕때 예부상서로 계시면서 친원(親元)에서 친명(親明)으로 바뀌는 배몽시기(排蒙時期: 1362~1368)때 나라 정책을 바꾸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고 그 공훈으로 금자광록대부예부상서 해풍부원군(金紫光祿大夫 禮部尙書 海豐府院君)에 봉작(封爵)되시면서 우리는 본관(本貫)을 해풍김씨(海豐金氏)라 칭하게 되었다.
시조께서는 아들 휘 천일(天一)공을 두셨는데 고려조에서 지후(祗侯)벼슬을 지내셨으며, 손(孫)은 휘 대(岱)공으로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정부의 최고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왕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심사하는 평장사(平章事) 시랑(侍郞:정2품)을 역임하셨다.
시조님의 생(生) 졸(卒) 연월일은 알 수 없으며 묘소는 고려 개성의 왕성밖 남쪽 15리쯤되는 개풍군 상도면 대능리 궁동(開豊郡 上道面 大陵里 宮洞)에 있다고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계대(系代)와 행적(行蹟)을 상고 할 만한 문헌이 여러 번의 병화(兵火)로 실전(失傳)되고 묘(墓) 역시 실전(失傳)되어 여러 대에 걸쳐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알지 못하다 순조(純祖)29년(1829) 봄에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 19세 형조판서 휘(諱) 영(煐)공께서 풍덕 왼쪽 울릉동(蔚陵洞)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시조할아버님의 묘를 찾으셨다.
공께서는 지명이 능동이라 하거늘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으니 마을사람들이 이 산위에 큰 무덤 셋을 가리키며 이것이 고려조의 해풍부원군 묘라 이르기에 수하에게 명하여 묘를 파보게 하니 맨 윗 무덤에서 해(海)자 김(金)자 숭(崇)자 세 글자의 지석(誌石)을 찾으시고 다른 글자는 깨지고 부서져서 자획(字劃)을 알수가 없고 그 아래 두 무덤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한다.
지석의 해는 海豐이요, 김은 성(姓)이요, 숭은 휘자 숭선(崇善)이니 우리 시조의 묘 임이 의심 할 바 없다. 이해에 경향 각지의 종친에게 통보하여 재물을 모아 봉분(封墳)을 다시 쌓고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판서 휘 영(煐)공께서 비문을 짓고 쓰시어 다음해인 1831년 봄에 비석과 상석등 석물을 갖추시고 효성스럽게 제사를 올리고 춘추제향(春秋祭享)을 받들어 왔으며, 고종10년(1873)에는 황간금산파 21세 휘 석(奭)공이 비문을 짓고 남양쌍부파 22세 휘 태욱(泰郁)공이 비문을 써서 묘비를 크게 개립(改立)하였다.
시조할아버님 시제는 음10월5일로서 1950년 6.25동란 이전까지는 개성 묘소에서 시제를 봉행하였으나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로는 묘소가 북한에 귀속하게 되어 이곳 남한에서는 갈수가 없게 되었다.
1983년 이후 대종회에서는 본래의 시제일인 음10월5일앞 일요일을 택하여 남한땅에서 시제를 봉행하던중 1991년에 시조할아버님의 영정(影幀)을 고증에 의하여 영상(影像)하고 대종회 사무실 상좌에 영정각(影幀閣)을 짓고 봉안하고 있으며 화성군 우정면 화산리 일원에 소재하는 남양쌍부파 묘당(廟堂)에는 영정사진을 봉안하고 이곳에서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
해풍(海豐)은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으로 북한에 위치하고 있다. 해풍의 지명(地名) 변천(變遷)을 살펴보면 고구려시대에는 정주(定州) 하원(河源)이라 칭하고, 고려조에 와서는 8대왕 현종(顯宗)9년(1018)에 개성현에 속하고, 11대왕 문종(文宗)17년(1063)에 개성부에 속하고, 16대왕 예종(睿宗)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개칭하고, 26대왕 충선왕(忠宣王)2년(1310)에 해풍군(海豊郡)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조 3대왕 태종(太宗)13년(1413)에 개성부에 속하고, 태종18년(1418)에 다시 해풍군이라 칭하였다. 4대왕 세종(世宗)24년(1442)에 해풍군과 덕수현(德水縣)을 합하여 풍덕부(豊德府)로 하고, 23대왕 순조(純祖)23년(1823)에 개성부에 속하고, 별호(別號)로 덕수 하원 정주라 칭하였다.
26대왕 고종(高宗) 광무(光武)10년(1906)에 군(郡)이 되고, 일제치하(日帝治下) 1930년에는 개성부외의 땅을 합쳐 개풍군(開豊郡)이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본관을 해풍(海豐)이라 칭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님께서 해풍군(海豐郡)에 거주하시면서 해풍부원군(海豐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신데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숭선공을 시조로 모시는 해풍김시 후손중에 8세 휘 수연(壽延)공계 후손 덕수김씨(德水金氏), 10세 휘 수(守)공계 후손은 정주김씨(貞州金氏)라 칭하고 있다. 이는 고려 공민왕23년(1374) 친원파인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10세의 우(禑)을 왕위에 올려 놓고 북원의 연호인 선광(宣光)을 쓰면서부터 친명파인 우리 해풍김씨는 정란(政亂)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고 종친간에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몇백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후대에 와서 해풍군의 별호인 정주, 덕수를 따서 관향위주(貫鄕爲主)로 본관을 정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 정조15년(1791)17세 휘 광악(光岳)공께서 제1차보인 신해보(辛亥譜)를 편찬하실 때 본관을 달리하고 있으나 시조는 해풍부원군 숭선공이시니 동원종문(同源宗門)임이 확인되었고 서기 1865년 제3차보인 을축보(乙丑譜)수찬시에는 풍덕수운 휘 평(枰)공계, 남양쌍부 휘 장(樟)공계, 덕수(구 야교) 휘 수연(壽延)공계, 정주(구 돈암) 휘 수(守)공계, 황간금산 휘 효신(孝信)공계, 평양 휘 체경(逮慶)공계, 안변 휘 재(載)공계등 전국 각파에서 수단에 참가하여 해풍김씨세보에 등재되었으며, 서기 1983년 해풍김시대종회에서는 해풍김씨, 덕수김씨, 정주김씨 대표가 모여 본관을 달리 호칭하고 있으나 휘 숭선공을 시조로 모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재확인하고 제3차보명을 해풍(덕수,정주)김씨세보로 하여 합보(合譜)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김숭선(金崇善)공 후손들은 해풍김씨대종회(海豐金氏大宗會)를 중심으로 하여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야 한다. |
해풍김씨 종원들은 경향 각지에 분포하여 거주하고 있으며, 파명은 중시조의 거주지명을 택하여 호칭하게 되었다.
해풍김씨 세계분파는 6세(世)에서 이(泥)공은 풍덕수운파(豐德水雲派), 휘 항(沆)공은 정주파(貞州派), 휘 체경(逮慶)공은 평양파(平壤派), 휘 재(載)공은 안변파(安邊派)가 되시고, 7세(世)에 와서 풍덕수운파에서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와 덕수파(德水派)가 분파되고, 정주파에서 황간금산파(黃澗金山派)가 분파되었다. 그후 8세(世)에서 14세(世)까지 몇분 선조님께서 거주지를 이동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시면서 현재는 20개파로 되어 있다.
선대(先代) 조상님의 거주지 분포를 살펴보면 풍덕수운파, 산귀파, 이호파, 유현파, 관곡파, 덕수파는 경기도 개풍군, 장단군에서 세거하시고, 정주파는 경기도 장단군, 개풍군, 황해도 신계등지에서 세거하시고, 일부는 제주도에서도 세거하시고 있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하여 강원도 화천, 춘천, 황해도 사리원, 충북 황간, 대구시, 전북 부안 고창, 광주시, 경기도 포천, 강화, 부산시, 진주, 평양, 안변 등지에서 세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원의 인구분포현황은 1986년도 경제기획원 통계국 발표에 의하면 해풍김씨 전체는 15,025명이고, 본관별로는 해풍 8,141명, 덕수 4,385명, 정주 2,499명이다.
285개 김씨중에서 해풍김씨는 인구수에 의하면 35번째의 성씨이다. |
자료: 대종회보 제 23호 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