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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김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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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풍김씨 가문을 빛낸 선조님을 소개합니다.

    학 행 편 (學 行 篇)

    1. 효절공(孝節公) 남정(嵐亭) 시창(始昌)공 가문(家門) : 황간금산(黃澗金山)
    . 9세 시창(始昌)공   자 정양(廷揚) 호 남정(嵐亭) 사호 효절(孝節) (1472 - 1558)
      부 대사성 의(顗) 조 사직 효신(孝信)
     
    남정 김시창공은 중종14년 기묘년(1519)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선생이 집권했을 때 학덕을 갖추신 훌륭한분 70인을 천거한 기록에 “김시창은 학식과 덕행이 뛰어남이 있느니라”고 쓰여 있고, 김산(金山)과 황간(黃澗) 두 읍(邑) 유생들이 모여 남정선생의 훌륭한 행적을 추앙하여 유궁(儒宮)에 철향(醊享)하게 되었으며, 남정선생을 모시던 김산 경렴서원(金山 景濂書院)과 황간 모현대서원= 송계서원(黃澗 慕賢臺書院 = 松溪書院)은 흥선대원군 집정(執政)시 전국의 서원철폐령으로 두 서원이 동시에 철폐되었고 그후에 송계서원만이 지방유림인 안삼준(安三俊) 박재원(朴齋元) 등에 의하여 재건되었다고 영동군 향토사적조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955년 3월에 충북 영동군매곡면수원리(慕賢臺)에 송계서원유허비(松溪書院遺墟碑)를 세우고 보호각을 건립하여 창령조씨 문장공 매계 조위(文莊公 梅溪 曺偉)선생, 밀양박씨 문목공 송당 박영(文穆公 松堂 朴英)선생, 해풍김씨 효절공 남정 김시창(孝節公 嵐亭 金始昌)선생, 충주박씨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선생, 고성남씨 삼괴당 남지언(三槐堂 南知言)선생, 충주박씨 일석 박유동(一石 朴維東)선생 등 6현(六賢)의 단묘를 설치하고 매년 3월15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김산 경렴서원에는 점필재 김종직공, 동대 최선문공, 매계 조위공, 남정 김시창공 등 네분이 배향되어 계시고 삼괴당 남지언공은 남정선생의 사위가 되신다.
     
    공은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으로 삼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생존시에는 그 봉양을 정성으로 하고 돌아가심에 슬퍼함과 제사를 극진히 받들고 거상 시에는 호랑이가 와서 여막 옆에서 항상 지켜주며 밤마다 곡성에 따라 울부짖었다 한다. 그후 공께서 돌아가시던 날 저녁에는 서기(瑞氣)가 하늘에 비치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서 이르기를 “김시창은 김산사람으로 소학(小學)의 예절이 몸에 배인분으로 친상을 당하였을 때 여막을 짓고 시묘함에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고 제사 때마다 초상 때처럼 곡(哭)을 하며 예절을 지키고, 성종대왕의 3년상도 입었고 중종대왕도 그리 했으며 특히 인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나이 70이 넘었으되 다 삼년상을 마침으로 임금께서 효절(孝節)이란 사호(賜號)를 내리시고 명종대왕 때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시니라”고 적혀있다. 정려각은 공의 출생지인 경북김천시대항면대룡동행정에 세워져 400여년 동안 면면이 내려오다 1950년 6.25동란으로 인하여 비(碑)가 파손되어 동란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정려비를 다시 만들면서 공의 묘소가 계신 김천시봉산면신암동고도암리 입구로 정려각을 이전하고 정려비를 세웠다, 정려각에는 정려비와 우암 송시열이 쓴 사호효절김시창지여(賜號孝節金始昌之閭) 현판이 보존되고 있다.

    자료: 대동보 하권 457쪽, 세덕록 123쪽. 황간금산

    나. 14세 응택(應澤)공    이윤(而 閏) (1619 - 1671)
      부 지중추부사 대정(大鼎) 조 증 판서 서(恕) 증조 증 부윤 순명(純明)
     
    공은 효절공 남정 시창(始昌)공의 오대손(五代孫)이시며, 임진왜란때 참전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시고 자헌대부 행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신 대정(大鼎)공의 차자(次子)로서 천성이 정직하고 순박하며 문장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밝아 당대의 학자인 백원(百源) 신석번(申碩蕃)과 오촌(梧村) 박유동(朴惟東)과 더불어 돈독히 지내고 조선중기의 학자이고 예학파(禮學派)의 거두인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주자학의 거유(巨儒)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뜻이 상통하여 벗삼고 지냈으므로 현존하는 남정 시창공의 정려각현판 “賜號孝節金始昌之閭”을 우암선생이 손수쓰시고, 공이 돌아 가시매 송우암선생은 친히 만장(輓章)에 시를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한다.

    자료: 대동보 하권 460쪽, 세덕록 210쪽. 황간금산

    다. 17세 이명(以溟)공    자 여등(汝登) (1682 - )
      부 진중(震重) 조 통덕랑 만겸(萬兼) 증조 남대장령 응태(應兌)
     
    공은 시창공의 8대손이시며, 천품이 고매(高邁)하고 학행과 덕행이 겸비하여 숙종조때의 문인인 문충공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과의 교우관계는 남달리 두터웠으며, 공은 남정 시창공 행적록을 간행하고 후손들에게 전하여 잘 보존하고 본받게 하셨으며, 대종회에서는 계해보(1983)와 신미대동보(1991)에 시창공 할아버님의 행적을 원문과 한글 번역문을 수록하게 되었다.

    자료: 대동보 463쪽, 세덕록 216쪽. 황간금산

    라. 17세 이철(以澈)공    자 여중(汝仲) (1669 - 1732)
      부 원중(元重) 조 만형(萬衡) 증조 응택(應澤)

    공은 시창공의 8대손이시며, 학무과 덕행이 겸비하여 영조때의 문신이며 학자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뜻을 같이 하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하여 논쟁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을 주장한 학자이시다.

    자료: 대동보 하권 471쪽, 세덕록 216쪽. 황간금산

    마. 18세 종식(宗植)공    자 사강(士綱) (1715 - 1760)
      부 이명(以溟) 조 진중(震重) 증조 통덕랑 만겸(萬兼)
     
    공은 시창공의 9대손 이시며, 이명공의 차자(次子)로서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크고 매사에 정중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학식과 덕행이 겸비하였으므로 영조조(英祖朝)때의 문인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선생과 도덕적으로 맺어진 의리가 깊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료: 대동보 하권 464쪽, 세덕록 220쪽. 황간금산

    2. 사오당(四吾堂) 형수(馨秀)공 가문(家門) : 풍덕수운(豐德水雲)
    가. 12세 형수(馨秀)공    자 훈경(薰卿) 호 사오당(四吾堂) (1590 - 1668)
      부 사복시 정 구(耈) 조 병절교위 의종(義宗) 증조 교수 헌(軒)
     
    공은 충효절행(忠孝節行)이 있고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이 세상에 뛰어났으므로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승지(承旨)가 되셨으며, 인조(仁祖)때 대제학(大提學)과 여러 판서(判書)를 지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하며 세상을 살았으며,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 혼조(昏朝)를 당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산야(山野)에 묻혀 살 때 여러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공의 효행과 학문을 가상히 여겨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데 교관 서경직(敎官 俆慶直)이 비명(碑銘)을 쓰고 찬성(贊成) 후제 김한(厚齊 金翰)이 행장(行狀)을 짓고 진선 조림(進善 曺霖)이 비명(碑銘)을 적었다.
     
    공의 둘째누이는 연안인(延安人) 김중국(金重國)에게 출가(出稼)하여 병자호란때 부군(夫君)이 적의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되니 몸을 물에 던져 순절(殉節)하시니 나라에서 가상히 여겨 정려문을 세워 순절을 표(表)하였다. 이 행적이 사오당의 행장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190쪽, 세덕록 134쪽, 풍덕수운

    나. 15세 숙(淑)공        자 선지(善之) (1688 - 1730)
      부 상성(相成) 조 현감 지(砥) 증조 승지 형수(馨秀)
     
    공은 충효절행과 학문이 뛰어난 사오당 형수공의 증손으로서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한 행동으로 바르게 살며 소학(小學)에서 시부(詩賦)와 문장에 이르기까지 통달(通達)하였으나 스스로 겸손하며 세상에 이름을 내지 않고 인재양성(人才養成)에 힘쓰셨다.

    자료: 대동보 사원 194쪽, 세덕록 211쪽, 풍덕수운
     

    다. 17세 광악(光岳)공    자 하중(夏仲) (1735 - 1792)
      부 효석(孝錫) 조 숙(淑) 증조 상성(相成)
     
    공은 충효절행(忠孝節行)가문의 자손(子孫)으로서 효행과 문장이 뛰어나 영조(英祖)35년(1759)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등과하시고 영조45년(1769) 8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되시고 동49년에 장령으로 재직하시고, 정조(正祖)12년(1788) 1월에는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으로 계시면서 왕에게 10조목(拾條目)을 상소(上疏)하셨다.
     
    첫째는 성학(聖學)을 밝히는 일입니다.
    둘째는 기강(紀綱)을 세우는 일입니다.
    셋째는 명분(名分)을 바로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공도(公道)를 넓히는 일입니다.
    다섯째는 언로(言路)를 여는 일입니다.
    여섯째는 염치(廉恥)를 면려하는 일입니다.
    일곱째는 사송(詞訟)을 간명하게 하는 일입니다.
    여덟째는 관방(官房)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아홉째는 선비들의 추향을 단정히 하는 일입니다.
    열째는 민속(民俗)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
     
    왕이 비답하기를
    “권면은 진술한 10조를 진부한 말이라 하지 말라, 개중에는 묘리(妙理)가 있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공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을 역임하셨다.
     
    공은 영조40년(1764)에 각계파종친들과 뜻을 모아 해풍김씨족보(海豐金氏族譜) 초안작성에 착수하여 정조15년(1791)에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辛亥譜)를 창간하셨으며, 이것이 효시(嚆矢)가 되어 1991년에 족보간행 200주년기념으로 7차보인 해풍김씨대동보(海豐金氏大同譜)가 간행되었다.

    자료: 대동보 상권 214쪽, 세덕록 255쪽, 풍덕수운

    3. 람전(藍田) 신(新)공 가문(家門) : 풍덕산귀(豐德山歸)
    가. 12세 신(新)공    자 덕부(德夫) 호 람전(藍田) (1544 - 1592)
      부 참판 간(侃) 조 성균관 사마 예종(禮宗) 증조 평양서윤 질(軼)
     
    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며 박학(博學)하고 행실이 돈독(敦篤)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예절을 갖추어 수업(修業)한 사람이 수백명이 되었다 한다.
     
    공은 여러 번 벼슬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선조(宣祖)때의 문인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와 성대곡(成大谷) 등과 더불어 여러 번 호산(湖山)에 모여 연회를 열고 시서(詩書)를 논하고, 공은 특히 글씨와 그림을 잘 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송(稱頌)을 받았다는 기록이 성대곡 행장기(行狀記)에 쓰여 있고 그 밖에도 공의 타고난 재질(才質)이 훌륭하고 전아(典雅)한 문장은 서곤(西昆)를 압도하고 폐단(弊端)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상소(上疏)하는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뛰어난 문장으로서 초야(草野)에 묻힘이 아깝기 그지없다고 당세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공의 후손들 중에는 많은 충신(忠臣)과 효자(孝子) 그리고 문장가(文章家)가 배출(排出)되었으니 장자(長子) 희일(希一)공은 사마시(司馬試)에 등과하시고 임진왜란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셨으며, 훌륭한 자손들의 공적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이 되시고 덕성군(德成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손자 응룡(應龍)공은 병자호란때 두아들 중립(仲立)공 인립(仁立)공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가 원손(元孫)을 적으로부터 구해내고 용전분투(勇戰奮鬪)하시다 전사하신 충신이시고, 손자 응창(應昌)공은 임진왜란때 선조(宣祖)잉금이 서울에서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실 때 곁에서 극진히 모신 공로로 호성공싱(扈聖功臣)이 되시고 개성군(開城君)으로 봉군되셨다.
     
    증손자 중립공과 인립공은 지극한 효자이시고, 득립(得立)공은 풍성군(豊城君)으로 봉군되시고, 득립공의 아들 원준(元俊)공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시고 개풍군(開豊君)으로 봉군되셨으니 4대를 이어가며 군(君)의 작호(爵號)를 받으셨다. 그 후대 자손들도 충효절행(忠孝節行)과 학문에 뜻을 두어 훌륭한 가문을 이어 가고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269쪽, 세덕록 207쪽, 풍덕산귀

    나. 18세 처중(處重)공    자 중유(重有) ( 1696 - 1766)
      부 성태(成兌) 조 감찰 귀중(貴重) 증조 인립(仁立)
     
    공은 신(新)공의 6대손이시며 충효가문의 자손으로서 천성이 단아(端雅)하고 언행이 단정(端正)하고 인자(仁慈)한 학자로서 일찍이 육계(六戒)를 지어 벽에 걸고 집안사람과 주변을 다스리신 분이시다.
     
    첫째 성찰(省察) : 살피고 반성할 것
    둘째 수렴(收斂) : 돈이나 물품은 보아서 거둘 것
    셋째 신언(愼言) : 말을 삼가 할 것
    넷째 절검(節儉) : 절약하고 검소할 것
    다섯째 과욕(寡慾) :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여섯째 방과(放過) : 허물을 짓지말 것
     
    등으로 매번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말만 앞세우지 말고 묵묵히 행하라 하셨다.
     
    공의 학덕(學德)이 널리 알려지니 도처(到處)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으며 그 중에서도 빈한(貧寒)한 사람 30여명을 골라 먹이고 입혀가며 교육을 했고 지필(紙筆)을 급여(給與)하며 학문을 권장하니 배우고자 하는 자가 많아 강사(講舍)가 좁아 다 수용(收容)하지 못하였다 한다.

    자료: 대동보 상권 278쪽, 세덕록 219쪽, 풍덕산귀

    다. 21세 호(昊)공     자 경일(慶日) 호 역거재(易居齋) (1806 - 1873)
      부 상려(相礪) 조 봉수(鳳壽) 증조 처중(處重)
     
    공은 성품이 간결(簡潔)하고 법도(法度)가 엄정(嚴正)하여 천성(天性)으로 효제지심(孝悌之心)이 돈독(敦篤)하였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부모님 봉양(奉養)에만 전념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스스로 즐겼으며 역학(易學)에 특히 정통(精通)하셨고 역서집해(易書集解) 두권을 저슬하셨다.
     
    향당(鄕堂)에서 선공감역(膳工監役)을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웃으며 말하기를 “약이나 캐고 새벽에 일어나 책상앞에 오르니 어찌 천명(天命)을 즐기는게 아니리요”라 했다, 또 “내가 하리(下里)에 살며 벼슬길에 무턱대고 나가지 아니함은 군자(君子)의 지조(志操)를 꺽기지 않는 바 이니라”했다.
     
    정석화(鄭石華)가 지은 공의 행적을 적은 글에 이르기를 “도와주는 사람 없이 고립(孤立)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일체의 사리(事理)가 구별없이 널리 융통(融通)되어 하나가 되는 그 지조를 속인(俗人)이 알지 못하더라, 공손하고 검소함이 있고 참되고 정성스러움과 함축성(含蓄性)이 있고 여유가 있는 재주를 사람이 알지 못하고 박학(博學) 다식(多識)하면서도 겉에 나서지 않음을 사람들이 알겠는가 그 학문과 그 고상함이 이러하여 특별히 벼슬을 주려해도 그 가운데 머무르려 하지 않으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자료: 대동보 상권 298쪽, 세덕록 223쪽, 풍덕산귀

    라. 21세 진(晋)       자 국보(國寶) (1810 - 1872)
      부 상려(相礪) 조 봉수(鳳壽) 증조 처중(處重)
     
    공은 충효가문에서 태어나시고 풍체와 법도가 남달리 뛰어나고 성품은 인자하여 늙을 때까지 모든일을 백형(伯兄) 호(昊)공에게 물어서 하였다.
     
    공은 성리학(性理學)의 이대조류(二大潮流)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에서 낙론을 지지한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의 문인인 나산 조유선(蘿山 趙有善)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고 학문을 연구하기 10년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더욱 좋아했고 항상 책상머리에 있으면서 시부(詩賦)를 짓고 읊었다.

    자료: 대동보 상권 306쪽, 세덕록 224쪽, 풍덕산귀

    4. 17세 시탁(時鐸)공    자 자목(子木) (1713 - 1751)
      부 어모장군 덕준(德峻) 조 부호군 청겸(淸兼) 증조 중추부사 처하(處河)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글 읽고 배움에 뜻을 두고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실천함을 근본으로 하시고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 성리학계(性理學系)의 대가(大家)인 도암 이재(陶庵 李縡)선생에게 사사(師事)했는데 동료들로부터 호걸(豪傑)이란 칭호를 받고 말년에는 이호(梨湖)에 사셨으며 서경(西京) 이학(理學)의 창학자(創學者)로서 이호선생(梨湖先生)이란 칭송(稱頌)을 받으셨다.
     
    공은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과 뜻을 같이 하고 성리학의 2대조류(二大潮流)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에서 낙론을 지지한 학자이시고, 공의 비석은 김원행선생이 찬(撰)하고, 영조15년(1739)에는 효행으로 정려문이 세워졌다.
     
    철종(哲宗) 7년(1856)에는 이호사(梨湖祠)에서 제향(祭享)을 지냈으며, 공의 이호문집(梨湖文集)이 보존되어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349쪽, 하권 749쪽, 세덕록 218쪽. 개성이호

    5. 여원(汝遠) 임중(任重)공 가문(家門) : 남양쌍부
    가. 16세 임중(任重)공    자 여원(汝遠) (1658 - )
      부 목판관 우(雨) 조 중추부사 시건(始乾) 증조 좌찬성 형(瑩)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돈후(敦厚)하며 학문에 독실(篤實)하여 회헌 조관빈(晦軒 趙觀彬)과 도암 이재(陶庵 李縡)등 학자와 더불어 이(理)와 기(氣)를 기본개념으로 하여 우주의 생성원리(生成原理)와 구조(構造) 그리고 인간의 본성(本性)에 대한 문제를 탐구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시다.
     
    공은 아들 3형제를 두시고 그 중 장자 전(澱)공과 삼자 선(渲)공이 이인좌(李麟佐)의난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분무원종1등공신(奮武原從一等功臣)에 봉(封)해 지시고, 공에게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이 증직 되셨다.

    자료: 대동보 중권 232쪽, 세덕록 213쪽. 남양쌍부

    나. 18세 상옥(相玉)공    자 온숙(溫叔) (1727 - 1790)
      부 병사 수(洙) 조 호조참판 하중(夏重) 증조 병조참판 성(城)
     
    공은 기골(氣骨)이 장대하시고 두뇌가 명석(明晳)하여 어려서부터 학업(學業)과 무예(武藝)를 연마하시고 영조(英祖)26년(1750) 무과(武科)에 등과하시어 전라좌수사 금군대장 평안병사 훈련원 도정(訓鍊院 都正)을 역임하시면서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으신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장신(將臣)이시다.
     
    공에게는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가 추증(追贈)되셨다.
    공의 시(詩) 한수(一首)가 전해지고 있다.
     
    청산(靑山)아 말 물어보자 고금(古今)일을 네 알니라
    만고영웅(萬古英雄)이 몃몃치나 지니였노
    이 후에 뭇는니 있거든 나도 함꾀 닐너라

    자료 : 대동보 중권 196쪽, 하권 708쪽, 세덕록 165쪽. 남양쌍부
     

    다. 19세 영(煐)공     자 경명(景明) (1772 - 1850)
      부 병조판서 상옥(相玉) 조 병사 수(洙) 증조 호조참판 하중(夏重)
     
    공은 장신공(將臣公) 가문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이 바르고 학문과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하고 남달리 대담하셨다.
     
    순조(純祖)29년(1829)년 1월에 제166대 3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부임하신후 송정동(松亭洞) 백성들의 잘못으로 민가(民家) 수백호가 다 타버리게 되자 공이 남북산(현재의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게 하여 주민들의 춥고 배고픔을 막아주셨는데 공은 소나무를 남벌하게 한 일로 파직이 되자 4개동민들이 공의 은덕을 기리어 정양리(貞梁里) 바위돌에 공의 공적을 새겨 놓은 행적이 있으며, 공은 포도대장을 24회 중임(重任)하시면서 어려운 시기에 치안질서(治安秩序)를 확립하신 공적이 있어 공을 흠모(欽慕)하여 지은 동요 세수(三首)가 전해지고 있다.
     
    공은 문장(文章)과 문필에도 뛰어나시니 당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장신으로 조선문무요인록(朝鮮文武要人錄)에 등재되어 있으며 공은 단시조(短詩調) 팔수(八首)와 장시조(長時調) 두수(二首)가 전해지고 있다.

    短 詩 調 一首

    일순천리(一瞬千里)한다 백송골(白松鶻)아 자랑마라
    두텁도 강남가고 말 가는데 소도 가느니
    두어라 지어지처(止於至處)니 네오 내오 다르랴



    泥 峴 將 臣 欽慕 童謠

    세월(歲月)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泥峴將臣)이 다 늙어 가노라
    좌우포장(左右捕將) 스물네번에
    조선천지(朝鮮天地)가 잔잔하고나

    자료: 대동보 중권 196쪽, 세덕록 170쪽. 남양쌍부

    라. 23세 영모(泳模)공    자 원규(元規) 호 죽석(竹石) (1864 - 1947)
      부 부사 태항(泰恒) 조 부사 도(鍍) 증조 부사 주철(周喆)
     
    공은 영조조(英祖朝)에 문장가이시고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신 임중(任重)공의 후손이시고, 선조 대대로 관직(官職)에 오르신 명문가 자손으로서 성품이 인자하고,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겸전(兼全)하고 평생을 서책(書冊)과 더불어 생활하신 선비이시며, 항상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시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예절(禮節)을 몸소 실행하시니 종친(宗親)은 물론이고 향민(鄕民)들에게도 예의의 사표(師表)가 되셨다.
     
    공은 선략장군 시종원 시어(宣略將軍 侍從院 侍御)로 관직에 계시다 국운(國運)이 쇠퇴하여 지니 고향으로 낙향하시어 쌍부사립광명의숙(雙阜私立光明義塾)을 설립하시고 청소년을 모아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힘쓰시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셨다.
     
    그리고 노년(老年)에는 집 안밖에 많은 꽃나무를 가꾸시고 독서(讀書)와 시상(詩想)에 심취되어 선인(仙人)처럼 사시면서 춘추(春秋)로 연 2회 친분이 있는 문인들과 더불어 시회(詩會)를 개최하여 글을 짓고 민족문화(民族文化) 창달(暢達)에도 공헌하셨다.
     
    유고(遺稿)로는 죽석문집(竹石文集) 시사집(詩社集) 연사집(蓮社集)등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시사집의 시계취지(詩契趣旨)에는 자녀교육의 도리(道理)와 목적 및 방법 등이 적혀저 있어 현세(現世)와 같이 도덕부재(道德不在)의 사회상에서는 어버이들에게 청소년 지도에 좋은 지침서(指針書)가 될 것 같아 아래에 일부를 기재한다.
     

    子云

    나는 생각하노라

    穀以種出 人以敎成

    곡식은 씨로서 산출되고 사람은 교육으로 이루어 진다

    養基苗在於耕耘
    充基才在於學問

    곡식의 묘목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경작하고 김을 매야하며 사람의 재능을 충실하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학문을 닦아야 한다

    爲基父兄 孰無敎育子弟之心
    然預不紡針 又無模範
    何以得成基材

    부형된 사람은 누구인들 자제를 교육하려는 마음이 없겠느냐 그러나 먼저 길삼하고 바느질을 안 하거나 혹은 본 받을 모범이 없다면 어떻게 그 재능을 달성 할 수가 있겠느냐

    凡人之心志行動
    專在於耳目見聞

    무릇 사람의 심지나 행동은 전적으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에 따라서 크게 영향을 받고 또 다르게 된다

    故 長者敎之以義方
    不納於邪

    그러므로 어른은 자제에게 올바르고 방정한 것 만을 가르치고 사악한 것을 용납치 않아야 한다

    恒以善行嘉言 日講時聽
    以爲習慣 以堅心情

    항상 착한 행동과 좋은 말만을 자제들에게 날마다 강하고 수시로 타일러서 습관이 되게 하여야 하며 또 그들의 마음이나 정서를 굳게 단련해야 한다

    必使後生之向方
    不出於範儀中而己矣

    그리하여 후생들로 하여금 지향하고 나가는 바가 절대로 규범이나 예의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才子 良心 高尙基志
    儒雅文風 扶持淸流

    재주있는 선비들이 착한 마음과 고상한 뜻으로 유교의 우아한 기풍을 굳게 간직하고 세상에 맑은 바람이 흘러 넘치게 하여야 한다

    將以一鄕士類
    志之所住 行之所發
    必在于斯文之中
    豈不爲八德之方乎

    그래야 장차 고을에 사는 선비들의 뜻이 바르게 뻗고 행동의 나타남이 학문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팔덕(八德)을 달성하는 방도가 아니겠느냐
    八德: () () () () () () () ()

    古者文翁 爲蜀郡太守
    司馬相如 於是乎出

    옛날 한()대에 문옹(文翁)은 경제(景帝)와 무제(武帝)때에 학교를 세우고 교화에 힘을 썼으며 그 덕택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 같은 문인이 나타났다.

    王豹處於淇
    河西善歌謠

    춘추시대에 왕표(王豹)는 기수(淇水)에 살면서 노래를 잘 불렀다. 그러자 그의 영향을 받고 하서(河西)사람들도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此曰 聞詩見習俗美
    而興心 所致也

    이를 가리켜 그 시대의 시를 듣고 습속을 보는 것이 곧 민간의 기풍을 아름답게 하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분발케 하는 바탕이라 말하는 것이다

    惟願同志君子

    내가 동지 군자에게 바라는 바는

    合心同德 鳩財成契

    합심하고 덕을 같이 하여 재물을 추렴해서 계를 조직하고

    立木殖利 至於多數

    원금을 세우고 이식을 불려서 그 액수가 많아지면

    隨時折財 多貿經傳

    수시로 일부를 헐어서 경서를 구매하고

    兼買筆墨 各使子孫
    讀之書之

    또 필묵을 사들여 자손들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면 좋겠나이다

    자료: 대동보 중권 512쪽, 세덕록229쪽. 남양쌍부

    6. 집의당(集義堂) 태원(泰元)공 가문(家門) : 풍덕관곡(豐德官谷)
    가. 22세 태원(泰元)공    자 춘백(春伯) 호 집의당(集義堂) (1863 - 1932)
      부 진사 석(鉐) 조 낙철(樂喆) 증조 경(熲)
     
    공은 무과에 등과 하시고 별군직(別軍職) 선전관(宣傳官)으로 계시다가 구한말(舊韓末) 단발령(斷髮令)이 공포(公布)되자 뜻을 같이하는 김하락(金河洛) 조성학(趙性學) 구연영(具然英) 신용희(申龍熙)등과 1896년1월1일에 이천군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이 있는 이천(利川)에서 이천수창의군(利川首昌義軍)을 결성하고 안성(安城) 광주(廣州) 일대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일군(日軍)을 섬멸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셨다.
     
    1906년에는 류인석(柳麟錫)의 명(命)을 받아 최익현(崔益鉉)의 진(陳)에 합류하여 소토장(召討將)으로 홍주(洪州) 전주(全州) 등지에서 활약하는 등 전,후기(前,後期) 의병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전공을 세우셨으며, 그 공적이 추인되어 1993년8월15일 광복절기념행사에서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이 추서(追敍)되었다.
     
    공은 당대의 문장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인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의 제자가 되어 그의 학통을 잇고 학자(學者)로서 의병장(義兵將)으로서 활약하시면서 집의당 유고(集義堂 遺稿)를 남기셨으니 학덕(學德)을 갖추신 선조님이시다.

    자료: 대동보 중권 966쪽, 세덕록 105쪽. 풍덕관곡

    나. 23세 성모(性模)공    자 도존(道存) (1889 - 1958)
      부 의병장 태원(泰元) 조 진사 석(鉐) 증조 낙철(樂喆)
     
    공은 구한말 경기(京畿) 강원(江原) 홍주(洪州) 전주(全州)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시고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 문하에서 학문을 수업(修業)하신 부친 집의당 태원(泰元)공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시고 원주(原州) 제천(提川) 영월(寧越) 등지에서 후학지도(後學指導)에 노력하셨으므로 이 지역민들은 김학사(金學士)라 칭송(稱頌)하고 있다.
     
    공은 부친의 유고를 정리하고, 취정록(就正錄), 별고(別稿) 등을 남기시고, 이를 근거로하여 집의당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게 되었으니 학덕을 갖추신 학자이시며 효자로서 추앙(推仰) 받아야 할 선조이시다.

    자료: 대동보 중권 966쪽, 세덕록 234쪽. 풍덕관곡

    7. 언명(彦明) 희성(希聖)공 가문(家門) : 덕수(德水)
    가. 10세 희성(希聖)공    자 언명(彦明) (1507 - 1544)
      부 장사랑 세형(世亨) 조 병절교위 수연(壽延)
     
    공은 중종(中宗) 29년(1534) 3월9일 문과시(文科試) 급제자 26인중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정응두(丁應斗)와 함께 동반장원(同伴壯元)을 하고 해운통판(海運通判),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을 역임하셨다.
     
    공은 원래 재주있고 덕행이 높아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진복창(陳復昌)등의 질투와 당시 권세가들의 배척을 받아 사은숙배(謝恩肅拜)도 하기전에 파직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공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유학자인 퇴계 이황선생과 친교를 맺고 가문을 빛내주신 학자로서 자손을 잘 양육하시어 많은 학자와 충신이 배출되었으며, 사효자 일열녀(四孝子 一烈女)의 효행가문을 이루게 하셨다.

    자료: 대동보 상권 551쪽, 세덕록 207쪽. 덕수

    나. 11세 춘(春)공     자 인백(仁伯) (1533 - 1592)
      부 성균관 직강 희성(希聖) 조 장사랑 세형(世亨) 증조 병절교위 수연(壽延)
     
    공은 학자(學者)이신 희성공의 장자로서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뜻을 두고 면학을 하셨으며, 선조(宣祖)9년(1576) 사마 양시(司馬 兩試)에 등과하시고, 선조10년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등과하시어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을 역임하셨다.
     
    공의 묘비명에는 “덕행(德行)을 널리 쌓고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으니 그 누가 경경(慶敬)하지 않으리오 후손들은 효성스러웠으며 혁혁하였으니 이는 다 공의 음덕(蔭德)이라” 하였다. 이는 지평 김동필(持平 金東弼)이 글을 짓고 진사 진기범(進士 陳箕範)이 썼다.

    자료: 대동보 상권 552쪽, 세덕록 245쪽. 덕수
     

    다. 13세 집(集)공     자 자앙(子昻) (1595 - 1646)
      부 극휘(克輝) 조 성균관 전적 춘(春) 증조 성균관 직강 희성(希聖)
     
    공은 인조(仁祖)3년(1625) 무과(文科)에 등과하시고 고원군수(高原郡守)를 역임하셨다.
     
    효종(孝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백현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공을 칭송하기를 “서락(西洛. 평양)에서 글 잘 하고 품행방정(品行方正)한 사람은 김집(金集)뿐이라고 하였다” 한다.
     
    공의 종형제(從兄弟) 업(嶪) 리(峛) 언(言) 현(見)은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친이신 경휘(景輝)공을 모시고 피난을 갔다가 오랑케에게 부친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4형제가 부친을 대신하여 죽기를 청하다 5부자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공은 백부이신 경휘공과 4촌 사형제와 남편을 따라 자결한 계수 옥천전씨(沃川全氏)의 장례를 어린 조카 공근(公謹)을 도와 정중히 치루시고, 그 후에도 종친간의 돈목과 종사에 공헌하신 행적이 남아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556쪽, 세덕록 209쪽. 덕수

    라. 22세 성효(性孝)공    자 백휴(百休) 호 송남(松南) (1765 - 1850)
      부 생원 광복(光復) 조 통정대부 정화(鼎和) 증조 부호군 치성(致聲)
     
    공은 순조(純祖)3년(1803)에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이시며, 덕행과 학식이 뛰어 났고 문장(文章)에 능통(能通)하였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셨다.
     
    만년(晩年)에는 봉산호정사(蓬山壺精舍)를 짓고 산림풍월(山林風月)에 취미를 갖으면서 사시고 저서(著書)로 봉호집(蓬壺集)을 남기셨다.
    공의 행적이 부안읍지(扶安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800쪽, 세덕록 226쪽. 무장부안

    마. 25세 길상(吉相)공    자 상언(祥彦) 호 연사(蓮史) (1887 - 1963)
      부 감찰 영순(永舜) 조 석구(碩龜) 증조 진사 성효(性孝)
     
    공은 성품이 청아(淸雅)하고 고매(高邁)하며 기질이 활달하고 단정하며 효심이 지극하셨다.
     
    학문이 뛰어 났으며 집안 일을 잘 다스리면서 종제(從弟) 윤상(潤相)공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산수(山水)를 노닐면서 풍월을 읊었고 명승고적을 두루 소요(逍遙)하시고 개인문집(介人文集)을 남기셨다.

    자료: 대동보 상권 801쪽, 세덕록 240쪽. 무장부안

    8. 사규(士圭) 재옥(載玉)공 가문(家門) : 정주
    가. 20세 재옥(載玉)공    자 사규(士圭) (1725 - 1792)
      부 형복(亨復) 조 세광(世光) 증조 좌승지 종엽(宗燁)
     
    공은 영조29년(1753) 문과(文科)에 등과하시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호조정랑(戶曹正郞)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과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역임하셨다.
     
    성균관에 계실때 역경(易經)의 건괘(乾卦)를 강론(講論)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고, 뒤에 또 전강(殿講) 유생(儒生)중 뛰어난 사람을 모아 임금이 친히 행하는 시험에 으뜸을 차지하셨다.
     
    또한 남해현령으로 재임시에는 손름(損廩)으로 학재(學財)를 삼아 몽사(蒙士)를 교양(敎養) 시키셨다.

    자료: 대동보 하권 202쪽, 세덕록 220쪽. 정주

    나. 20세 재영(載泳)공    자 백심(伯深) 호 쌍괴당(雙槐堂) (1737 - 1809)
      부 형범(亨範) 조 절충장군 시광(始光) 증조 좌승지 종엽(宗燁)
     
    공은 영조조(英祖朝)에서 경학(經學)에 뛰어나 당대의 문인(文人)이며 유학(儒學)에 조예가 깊었던 나산(蘿山) 조유선(趙有善)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등과 세교(世交)가 두터웠던 선비이시다.

    자료: 대동보 하권 215쪽, 세덕록 221쪽. 정주

    다. 20세 재진(載晋)공    자 동수(桐叟) 호 박연제(泊然齊) (1744 - 1804)
      부 진사 형백(亨百) 조 절충장군 시광(始光) 증조 좌승지 종엽(宗燁)
     
    공은 정조(正祖) 원년(1777)에 진사가 되시고 오륜(五倫)을 독실히 실천하며 예절을 잘지키고 글 잘하고 남을 위하여 물질적인 베품을 기뻐하며 실행하시고 문집(文集)을 남기셨다.
     
    공의 비문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고 수원의 지지대비(遲遲臺碑)의 비문을 지은 문헌공(文憲公) 서영보(徐榮輔)가 찬(撰)하였다.

    자료: 대동보 하권 215쪽, 세덕록 222쪽. 정주

    라. 22세 종흠(宗欽)공    자 경초(敬初) (1760 - 1811)
      부 언전(彦琠) 조 재항(載沆) 증조 부사과 형주(亨冑)
     
    공은 나산(蘿山) 조유선(趙有善)에게 사사(師事)하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탐구하시어 기이편(氣二編)과 목암집(牧菴集)을 저술하신 학자이시다. 목암집은 대종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자료: 대동보 하권 315쪽, 세덕록 228쪽. 정주
    자료: 대종회보 제 28호, 29호, 30호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