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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김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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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문을 빛내주신 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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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풍김씨 가문을 빛낸 선조님을 소개합니다.

    효자 열부편 (孝子 烈婦篇)

      효(孝)란 부모를 봉양하고 섬기는 일로서 유교(儒敎)에서는 인간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덕목(德目)으로 삼고 있어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였다. 효는 윗사람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이나 굴복이 아니며 부모가 자식을 길러준 대가로서 바라는 타산적인 것도 아니다. 참된 효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정성 되이 모시려는 따뜻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효가 모든 덕(德)의 근본임을 밝히고 위로는 왕에서 아래는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실천해야할 효에 대하여 효경(孝經)에서 설명하고 있다.
      열부(烈婦)란 어떤 어려움이나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남편을 위하거나 절개를 지켜 남의 본보기가 될만한 여자를 일컬으며 열녀의 행적을 찬양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정문(旌門)을 열녀문(烈女門)이라 하며 열녀의 행적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열녀비(烈女碑)를 세운다. 우리 선조님의 효행과 열녀행적이 뛰어나 세인으로부터 칭송 받고 나라에서 포상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1. 사.서원배향(祠.書院配享)        (위로)
    가. 9세 시창(始昌)공      자 정양(廷揚) 호 남정(嵐亭) 시호 효절(孝節) (1472-1558)
     

    부 대사성 의(顗) 조 사직 효신(孝信)

     
    공은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으로 삼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생존시에는 그 봉양를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 돌아가심에 슬퍼함과 제사를 극진히 받들고 거상 시에는 호랑이가 와서 여막옆에서 항상 지켜주며 밤마다 곡성에 따라 울부짖었다 한다. 그후 공께서 돌아가시던 날 저녁에 서기(瑞氣)가 하늘에 비치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서 이르기를 “김시창은 김산사람으로 소학(小學)의 예절이 몸에 배인 분으로 친상을 당하였을 때 여막을 짓고 시묘함에 한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고 제사 때 마다 초상 때처럼 곡(哭)을 하며 예절을 지키고 성종대왕의 3년상도 입었고 중종대왕도 그러했으며 특히 인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나이 70이 넘었으되 다 삼년상을 입었느니라.   나라에서 불러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한평생을 마침으로 임금께서 효절(孝節)이란 사호를 내리고 명종대왕때 정문을 세우게 하시니라”고 적혀있다.    
     
    남정 김시창공은 김산 경염서원(金山 景 廉書院=松溪書院)과 황간 모현대서원(黃澗慕賢臺書院=松溪書院)에 배향되어 도다 흥선대원군 집정 시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두 서원이 철폐되었다. 그후에 송계서원만이 지방 유림(儒林)에 의하여 재건되었으나 현재는 충북 영동군 대곡면 수원리 모현대에 송계서원유허비를 세우고 보호각을 건립하여 창령조씨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선생, 밀양박씨 문목공 송당 박영(朴英)선생, 해풍김씨 효절공 남정 김시창(金始昌)선생, 충주박씨 오촌 박응훈(朴應勳)선생, 고성남씨 삼괴당 남지언(南知言)선생, 충주박씨 일석 박유동(朴維東)선생등 육현(六賢)의 단묘(檀墓)를 설치하고 매년 3월 15일에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으며, 김산 경염서원에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동대 최선문, 매계 조위, 남정 김시창(金始昌)등 네분이 배향되어 계시고 삼괴당 남지언선생은 남정공의 사위가 되신다.

    자료: 대동보 하권 457쪽, 세덕록 123쪽, 황간금산

    나. 17세 시탁(時鐸)공    자 자목(子木) (1713 - 1751)
      부 어모장군 덕준(德峻) 조 절충장군 청겸(淸兼) 증조 절충장군 처하(處河)
     
    공은 무반(武班)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글 읽고 배움에 뜻을 두어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조선조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인 도암 이재(陶菴 李縡)선생에게 사사했는데 동료로부터 호걸이란 영예를 들었고 만년(晩年)에는 이호(梨湖)에 살았으며 서경이학(西京理學)의 창학자로서 이호선생이란 칭송을 받았다.
     
    공의 비문은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이 찬하고, 영조15년(1739)에는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철종7년(1856)에는 이호사(梨湖祠)에서 제향을 지내고 이호문집(梨湖文集)이 보존되고 있다.

    자료: 대동보 상권 349쪽, 세덕록 218쪽, 개성이호

    2. 정려문(旌閭門)        (위로)
    가. 9세 시창(始昌)공     자 정양 호 남정 시호 효절 (1472 - 1558)
      서원배향 “가” 참조
    나. 12세 형수(馨秀)공    자 훈경(薰卿) 호 사오당(四五堂) (1950 - 1668)
      부 사복시정 (耈) 조 병절교위 의종(義宗) 증조 교수 헌(軒)
     
    공은 충효절행(忠孝節行)이 있고 경학(經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굳게 맺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매 산에 숨어 살며 여러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에서 공의 효절을 가상히 여겨 정려문을 세우고, 공의 신도비(神道碑)을 세우는데 당대의 명인 교관 서경직(徐慶直)이 비명(碑銘)을 쓰고, 찬성 후제 김한(厚齊 金翰)이 행장을 짓고 진선조림(進善 曺霖)이 비명을 지었다.

    자료: 대동보 상권 190쪽, 세덕록 134쪽, 풍덕수운

    다. 13세 업(嶪)공        자 자첨(子瞻) (1603 - 1637)
      부 진사 경휘(景輝) 조 전적 춘(春) 증조 성균관 직강 희성(希聖)
     
    공의 4형제 업(嶪), 리(峛), 은(訔), 현(見)은 인조(仁祖)14년(1636) 병자호란을 당하게 되자 아버지 경휘공을 모시고 황해도 곡산 백암동으로 피난을 갔었다.  피난중 인조15년(1637) 1월3일에 업공 4형제는 양식을 구하러 출타하였다가 귀가해 보니 엄친 경휘공이 오랑캐에 붇잡혀 죽음직전에 있었다.  이에 네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음을 청하였으나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셋째인 은공의 처 옥천 전씨도 남편 곁에서 순절하였고 또 늙은 머슴인 노송(老松)도 주인을 따라 그 시신(屍身)옆에서 자결하였으니 인조 15년(1637) 1월 3일에 일곱 분이 순절(殉節) 하였다.   순조31년(1831)에 특명으로 효행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중권 446쪽, 세덕록 144쪽, 남양쌍부파

    라. 16세 귀종(貴宗)공    자 종효(宗孝) (1644 - 1713)
      부 중립(仲立) 조 응룡(應龍) 증조 보조공신 희일(希一)
     
    공은 성품이 독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평생 간소한 의복과 담백한 음식으로 살고 계모를 섬김에도 지성을 다하였으니 공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얻어 봉양하고 넙적다리 살을 베어 병환을 낫게하고 60이 넘을 때까지 잠자리를 보아드리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예를 행하고 매사에 어머니 허락을 받아 행하였으니 나라에서 그의 효행을 가상히 여기어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상권 277쪽, 세덕록 139쪽. 풍덕산귀

    마. 17세 시탁(時鐸)공    자 자목(子木) (1713 - 1751)
      서원배향 “나” 참조
    바. 19세 태순(兌純)공    자 군일(君一) (1726 - )
      부 주부 두표(斗杓) 조 가선대부 세징(世徵) 증조 천준(天俊)
     
    공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하면서 사친(事親)의 범절(凡節)을 익히시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다.
     
    공의 둘째아들 20세 형철(亨喆)공 또한 효행이 지극하여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공의 손자이며 형철공의 장자인 21세 구(銶)공 역시 효자가문에서 성장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나라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 童蒙敎官)이 증직되시니 공의 가문은 3대 효행포상을 받은 가문이다.

    자료: 대동보 247쪽, 세덕록 141쪽. 남양쌍부

    사. 21세 상호(祥浩)공    자 경지(慶之) (1777 - 1848)
      부 좌승지 은련(殷鍊) 조 집의 한채(漢彩) 증조 분무공신 흥창(興昌)
     
    공은 관(官)이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이시고 우애와 효성이 독실하여 아버님 병환이 위독할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의원을 찾아 약을 구하러 다닐 때 매번 어디서 백호(白虎)가 나타나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한다. 공의 효행을 임금이 들으시고 순조31년(1831)에 특명으로 효행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중권 446쪽, 세덕록 144쪽. 남양쌍부

    아. 옥천전씨(沃川全氏)    정려문 “다” 참조
    자. 해풍김씨(海豐金氏)
      열부(烈婦) 해풍김씨는 14세 두익(斗翼)공의 장녀로 태어나 이한철(李漢哲)공에게 출가하여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던 중 인조5년(1672) 어느 날 강도가 들어와 부군 이한철공이 해(害)를 입게 되었을 때 부인은 강도의 칼날을 몸으로 막아 난자(亂刺) 당하고 순절하니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상권 556쪽, 세덕록 150쪽. 덕수

    차. 결성장씨(結城張氏)
      숙인(淑人) 결성장씨는 장한철(張漢喆)공의 따님으로 16세 사헌부 감찰 귀종(貴宗)공과 혼인하고 시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혁혁한 공훈을 세우시니 13세 희일(希一)공은 덕성군(德成君), 14세 응창(應昌)공은 호성공신 개성군(扈聖功臣 開城君), 16세 원준(元俊)공은 개풍군(開豊君)으로 훈봉(勳封)되신 충의효절가문(忠義孝節家門)이다.
     
    숙인 장씨는 효행과 부덕(婦德)을 숭상하며 가통(家統)을 이어오던 중 어느 때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집에까지 침수가 되어 집안사람들은 지붕 위로 피신하며 같이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인은 옷을 단정히 입고 침상에 앉은채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는 절의(節義)를 지킨 부덕(婦德)을 가상히 여기시고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상권 277쪽, 세덕록 151쪽. 풍덕산귀

    카. 성주윤씨(星州尹氏)
      열부 성주윤씨는 윤시찬(尹時贊)공의 따님으로 17세 시(時逸)공과 혼인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며 생활하던 중 부군(夫君) 시일공이 46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니 남편의 뒤를 따라 우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으나 유복자(遺腹子)를 생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상(大祥)날 목숨을 끊으셨다.   나라에서는 부인의 절개를 가상히 여기어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자료: 대동보 상권 360쪽, 세덕록 152쪽. 개성이호

    3. 동몽교관(童蒙敎官)        (위로)
    가. 21세 구(銶)공        자 자명(子鳴) (1785 -1871)
      정려문 “바” 참조
    나. 21세 언장(彦璋)공    자 장옥(章玉) (1737- 1812)
      부 재항(載沆) 조 부사과 형주(亨冑) 증조 호조참판 성광(成光)
     
    공은 아버님 병환이 깊을 때 의원이 붕어로 약을 해야한다 함으로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려 할 때 큰 고기 수십 수가 얼음 위로 뛰어 나와 이를 거두어 가지고와 약을 해드리니 효험이 있었다. 이는 공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도우심이며, 어버이가 돌아가시니 여막에서 시묘(侍墓)하며 곡하며 울 때 한 스님이 항상 따라 다녔는데 소대상(小大祥)이 끝나던 날 저녁부터 그 스님은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순조22년(1822)에 공의 효행을 표창하여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 童蒙敎官)이 증직되었다.

    자료: 대동보 하권 307쪽, 세덕록 142쪽. 정주

    다. 24세 복렬(馥烈)공    자 윤문(允聞) 호 농재(農齋) (1862- )
      부 도정 동완(東完) 조 진사 상영(尙榮) 증조 진사 시형(時衡)
     
    공은 성품이 독실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가이며 덕행이 높아 향리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니 나라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으로 천거 하였다.

    공은 기묘년(1939)에 정주 해풍김씨세보를 간행하였다.

    자료: 대동보 하권 340쪽, 세덕록 147쪽. 정주

    라. 24세 장렬(璋烈)공    자 장옥(章玉) (1872 - )
      부 감찰 동선(東宣) 조 절충장군 상질(尙質) 증조 진사 시형(時衡)
     
    공은 효행과 덕행이 겸전한 문장가로서 향리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종형 복렬(馥烈)공과 더불어 나라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으로 천거 하였다.

    자료: 대동보 하권 345쪽, 세덕록 147쪽. 정주

    4. 능참봉(陵參奉)        (위로)
    15세 구존(龜 存)공       자 재숙(再叔) (1624 - 1704)
      부 형조참의 효성(孝成) 조 군자감 풍수(豐洙) 증조 병조참판 택추(宅秋)
     
    공은 선조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충효가문에서 성장하시며 효를 일상행실의 근본으로 삼고 실천함으로 향리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관직은 재능참봉(齋陵參奉)이시다.

    자료: 대동보 중권 901쪽, 세덕록 138쪽. 풍덕관곡

    5. 신도비(神道碑)        (위로)
    24세 영균(永均)공       자 영운(永雲) 호 인원(仁元) (1850 - 1902)
      부 윤구(潤龜) 조 좌승지 관효(寬孝) 증조 생원 광욱(光郁)
     
    공은 재주있고 기개(氣槪)가 특출하며 풍채가 늠름했고 눈빛이 밝고 날카로워 호랑이나 이리등 짐승도 공을 보면 두려워했다 한다. 관직은 직강(直講)에 이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우애와 신의로 평생을 지냈으므로 향리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향리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자료: 대동보 상권 818쪽, 세덕록 146쪽. 무장부안
    자료 : 대종회보 제 26호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