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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김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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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 통제사 1829년3월 ~ 1830년4월 김영(金煐) 선조님의 업적. (김진후 / 2019.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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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해풍김씨대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1회   작성일Date 24-11-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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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포루는 통영성의 3포루중 하나로 최근에 복원된 포루이다. 동포루는 동피랑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의 애환을 가진 문화재이다. 통영성 복원에서 동포루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지만 현주민을 무시한 동포루 복원이 아니라 주민과 호흡하고 동거하는 동포루와 탄생은 동피랑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중앙시장과 정량동을 연결하는 큰 도로인 동문로의 고갯마루가 옛 통영성의 동문(東門)이 있던 자리이다. 일명 ‘신흥문(新興門)’ 또는 ‘춘생문(春生門)’이라 불린 동문은 토박이지명으로 ‘동문까꾸막’이 있던 자리에 위치해 있다. 동문까꾸막은 동문고개라는 의미이며, 이 고개의 북쪽으로는 ‘동문 밖’이라 칭하였고 그 골짜기가 옛 ‘대밭골’이다. 그리고 ‘동문 안’이 옛날 통제영에서 상평통보인 엽전을 주조했다는 ‘주전골(鑄錢谷)’이 위치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동피랑을 올라간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통영의 얼굴을 보고싶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는 지 궁금하기도 하고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자주 간다. 처음 이곳을 올라갔을 때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고 비를 쫄딱 맞으며 올라가는 모습이 처량했는지 주차장 주인장께서 일회용 비옷을 주셨다. 그 덕분에 주전골에도 올라가 동피랑을 볼 수가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노점상 할머니들 사이로 비집고 중앙시장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아치형 아케이드로 들어갔다. 반찬거리를 주섬주섬 사기 위해 종종 들릴 때가 많은 전통시장이지만 일반 전통시장과 사뭇 다른 곳이다. 이곳을 이용하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뒤죽박죽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곳이다. 이런 중앙시장에 옛 성곽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중앙시장의 안길을 비집고 그 동쪽 끝 ‘동피랑’ 기슭 부근에 성곽 일부를 볼 수 있다. 이곳이 옛 동암문이며 수구문(水口門)이 일컫어졌던 곳이다. 수구문은 ‘씨거문’이란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옛날 성 안의 시체가 나가는 문이란 뜻으로 ‘시거문(尸去門)’에서 불리게 되었다는 속설이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 끝머리에서 동피랑 벽화마을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동피랑 벽화마을과 맞닿는다. 특히 주말이면 통영의 14만 인구가 이곳으로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곳이다. 동피랑에 벽화가 그려지고부터 많은 예인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 되었지만 예부터 이곳은 통영항을 가장 아름답게 내려볼 수 있는 곳으로 많은 시인들이나 풍류객들이 찾던 곳이기도 했다.

    일설에 ‘동피랑’은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동피랑 마을이 형성된 정확한 근거는 없다. 원래 ‘동피랑’은 통영성의 서쪽 벼랑인 ‘서피랑’과 함께 동쪽 벼랑지대를 일컫는 토박이지명이다. 즉 ‘피랑’은 벼랑의 통영사투리인 ‘비렁’ 및 ‘비랑’에서 변음된 지명이다. 이곳 동피랑 먼당에도 통영성을 지키던 초소인 동포루(東鋪樓)가 있었으며, 최근 그 웅장한 모습이 복원되 동피랑 마을과 함께 기거하고 있다. 원초에 동포루가 복원되면서 동피랑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이 동피랑 먼당에 있는 마을은 철거예정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주지 문제로 분쟁이 많았다. 당시 동피랑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통영시에서 제안한 보상금을 가지고 이주할 곳이 없어 눈물로 한숨 짓었다고 한다. 이런 안타까운 사실을 알고 푸른통영21이라는 통영의 환경단체가 도와 지금의 동피랑 벽화마을을 재건했다. 우스갯소리로 지금은 동피랑 땅값이 엄청 올라 많은 돈을 제시해도 이주하지 않겠다고 한다. 관광객들의 소음과 불쑥 집으로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무심한 행동들이 인제 반갑기만 한 동피랑 주민들이다. 동피랑에는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덤바우 길이 있다. 덤바우는 아주 큰 바위라는 뜻의 전라도 말이다. 그 덤바우 길에는 ‘통제사 김영 각암비문(統制使金煐刻巖碑文)’이 새겨진 ‘덤바우’(든바위)라 불린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순조 29년(1829년) 동피랑 기슭 마을인 송정동(松亭洞. 송징이), 해송정동(海松亭洞. 해송징이), 항북동(項北洞. 항북) 그리고 와동(瓦洞. 애액골)의 민가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불타 오갈 곳이 없어지는 참화를 겪었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166대 김영(金煐) ( 통제사였다. 불이 나자 김영 통제사는 덤바위에 올라가 주민들과 합심하여 몇 날을 화재를 진압하였다. 하지만 화마로 동피랑 주변 마을은 모두 초토화되었고 전쟁을 겪은 상황과 같았다. 통제사는 집을 잃어 갈곳이 없는 주민들을 불쌍히 여겨 인근 산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도록 허락해 주었다. 인근 산이 바로 남망산으로 금송령이 내려진 지역이었다. 하지만 화재로 집을 잃은 백성에게 살길을 열어준 김영 통제사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난 재목인 소나무를 남벌 죄목으로 다음해 파직되었다. 궁궐 건축이나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하는 소나무를 베어 백성들이 집을 짓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는 김영 통제사가 1830년 백성의 집을 짓게 한 것이 <대명률(大明律)> 이율(吏律) 제서유위조(制書有違條)를 위반한 죄로 처벌 받게 되었다. 이는 임금의 교지(敎旨)와 세자(世子)의 영지(令旨)를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율법인데, 죄인은 100대의 매를 가하는 형을 내려졌다고 한다. 아마도 김영(金煐) 통제사는 100대의 매를 맞고 파직을 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영(金煐) 통제사가 떠나는 길에는 수많은 통영 주민들이 나와 아쉬워하며 울었다고 한다. 통제가 떠난 후 이러한 사연을 화마를 진화한 덤바우 바위에 새겨 그의 선정과 은덕을 기리 기리고자 하였다. 그 후로도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우 신성시 했으며, 마을이름 또한 이 바위이름을 따서 ‘덤바우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0년대의 ‘동문고갯길’(동문로) 확장공사 때 파괴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동피랑에서 덤바우길로 내려가며 덤바우라는 이름을 쓰는 식당 두 곳을 만날 수 있는 게 덤바우에 대한 전설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덤바우의 파괴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가 파괴된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개발 아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라져버린 문화유산이 얼마나 많겠는가? 지금은 그의 은덕을 아는 사람은 없고 그의 덕을 기리는 덤바우 비석도 없지만 덤바우라는 식당명은 남아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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